거인의 향기: 브란트를 만나다. 보다 많은 민주주의를 감당하자

[대사의 베를린 일기] 정범구 주독일대사
   
뉴스 | 입력: 2018-12-18 | 작성: admin@admin.co.kr 기자

 

 

독일
Willy Brandt / commons.wikimedia.org

독일 현대사 뿐 아니라 20세기 세계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브란트( Willy Brandt; 1913-1992)의 출생지 뤼벡(Lübeck)을 찾았다. 독일의 가을 날씨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선물같은 10월의 주말이었다.

 


'사생아'로 태어난 그의 출신은 두고 두고 그를 괴롭혔다. 선거때 마다 정적들은 교묘하게 그의 출신 배경을 두고 비열한 선전전을 벌였다.

혼자 브란트를 낳은 그의 생모는 고달픈 생활전선을 지키느라 브란트의 양육을 그 외할아버지에게 맡긴다. 


브란트는 1933년 나치의 탄압을 피해 스웨덴으로 망명하기 전 까지는 외할아버지의 성을 따라 프람(Herbert Frahm)으로 불린다. 빌리 브란트란 이름은 망명지에서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사용하던 이름인데 나중에 아예 본명으로 사용하게 된다.


1949년 독일연방의회 의원이 된 그는 1957-66년 베를린 시장을 지낸다. 61년과 65년에는 사민당(SPD) 총리후보로 총선을 지휘한다. 66-69년까지 기민당(CDU)과의 연정에서 외무부 장관을 맡은 후 1969년 총선승리를 통해 총리가 된다. 사민당 출신으로는 전후 최초의 총리가 된 것이다.


흔히 브란트는 우리에게 동방정책(Ost-Politik)의 창시자, 동서냉전을 허문 평화주의자(사실 이 공로로 1971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로 많이 알려졌지만 그는 우선 철저한 민주주의자이다. 


1969년 10월, 총리로서의 첫 시정연설에서 그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감당하자! Wir wollen mehr Demokratie wagen!"고 외친다. 한 해 전에 독일뿐 아니라 서방세계를 뒤흔들었던 68혁명이 결국은 기존의 권위주의적이고 억압적 정치, 사회, 문화 체제에 대한 저항이었다고 볼 때, 브란트의 이런 선언은 주류 정치사회에서 나온 최초의 화답이었다.


1970년 12월 2일, 바르샤바의 차거운 돌바닥 위에 브란트가 무릎을 꿇었다. 겨울비가 추적거리던 날이었다. 게토 유대인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였다.


전세계로 급속히 퍼져 나간 이 장면(사진)은 나치에 의해 수백만의 인명피해를 본 폴란드 국민 뿐 아니라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러시아,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1972년 동독과의 기본협정 체결 전, 서독은 이미 소련과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과 우호친선조약을 맺게 된다.


 

브란트의 생애와 업적을 이곳에서 제대로 다루기는 어렵다. 그저 그가 태어나 자랐던 곳을 찾아간 김에 그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를 생각해 본다.


정범구 주독일대사
정범구 주독일대사


 

69년 총리가 되고 난 후 동유럽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에 나서면서 그가 내걸었던 구호는 "다가가기를 통한 변화(Wandel durch Annäherung)"이었다. 아마 그렇게 서로 오고가기를 반복하다가 유럽에서의 냉전도, 분단도 허물어졌던 것 아닌가 싶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관저는 1964년 브란트가 베를린 시장이던 시절, 시 영빈관으로 구입하여 사용하던 곳이다. 한 때는 그가 가족과 이곳에서 함께 살기도 했다. 관저에는 브란트가 그 당시 막내아들과 공놀이하던 사진도 걸려 있다.

가끔 집안에 있을 때면 어느 곳엔가 묻어있을 그의 체취를 찾아 나의 오감을 총동원해 본다.

지난 2월,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한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이 우리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회담 후 그가 자그마한 선물을 하나 문대통령께 내밀었다. 어느 독일화가가 그린 브란트 초상이었다.

그건 어떤 의미였을까?